CHAPTER 1

조흥 역사의 시작

1959

조흥화학공업 주식회사 설립

조흥의 창업과정은 1950년 3월 부산에서 해산물의 국내외 교역을 주목적으로 설립된 계동상회로부터 시작된다.
계동상회는 1930년대부터 함경남도 원산 태동상회를 운영하며 명태를 취급했던 함형준 회장, 인삼 재배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미곡상, 정미소 사업을 운영하였던 개성상인 홍종문 회장, 삼성상회를 열어 수산물 사업에 뛰어든 병영상인 박세정 회장,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숫자 계산이 천부적으로 뛰어난 이득춘 회장, 전라북도 정읍 출신 사업가인 이기종감사가 인연을 맺어 설립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널리 거래하던 중 6.25 동란으로 계동상회는 대금 회수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미 8군에서 매각하는 명태를 대량으로 인수, 판매하여 큰 이득을 봄으로써 이전의 손실을 만회했을 뿐 아니라 1952년에 설립된 계동산업 주식회사의 밑거름이 되었다.
1958년 2월 당시 조선제분에서 영등포공장을 매각하게 되자 계동산업 창업자 모두가 이를 인수키로 하고 대선제분을 설립하였다.
계동산업과 대선제분을 운영하면서 어느 정도 사업의 안정을 찾게 되고 신규 사업의 추진력을 갖게 된 무렵에 재래식 사카린 제조사업에 관여한 바 있었던 김명근 씨가 새로운 방식의 사카린 제조에 뜻을 두고 공동사업을 제의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한 함형준, 홍종문, 박세정, 김명근, 이득춘, 이기종 씨 6인이 회사 설립을 공동 발기, 공동 출자함으로써 조흥화학공업주식회사가 정식적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사카린은 대부분 밀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손으로 인공감미료 생산을 성공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업보다 전망이 밝았다.
조흥화학이라는 사명은 ‘좋은’ 제품을 만들자는 뜻에서 발음이 비슷한 ‘조흥’으로 정하고, 미국의 몬산토사와 같은 종합화학회사로 발전해야겠다는 뜻을 두어 ‘조흥화학공업주식회사’로 명명하게 되었다.

송담(松潭) 함형준 회장
(1914.6.12 ~ 1991.12.26)

장호(長湖) 홍종문 회장
(1912.11.23 ~ 1999.12.10)

지산(芝山) 박세정 회장
(1917.6.1 ~ 2001.2.5)

법준(法峻) 이득춘 회장
(1901.9.4 ~ 1969.4.30)

김명근 전무이사
( ~ 1972.3.18)

석제(石齊) 이기종 감사
(1904.8.17 ~ 1970.8.18)

제 1회 이사회 의사록

1960

문래공장 준공

공장입지는 가급적 서울과 가깝고 전력 및 용수 등의 공급에 문제없는 지역을 택하여 문래동에 1,200여 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1959년 11월 497평의 사카린 공장을 완공하였다.
20여 명의 사원들과 사원 숫자보다 많은 귀빈을 모신 자리에서 월 11톤 생산 능력의 사카린 공장 준공 테이프를 끊고 나서 감격적인 사카린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기술인 전기분해법을 일본에서 도입하여 기존의 생산효율이 부진한 재래식 공장과는 차별이 되었다.

1962

뉴-슈가의 탄생

사카린은 설탕의 500배 단맛을 내므로 가정에서는 양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1961년 3월과 5월에 단맛정, 단맛, 감미분, 감미정을 생산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설탕의 50배 내외의 감도를 갖고 있는 ‘싸이크라메이트’ 라는 인공감미료가 생산, 판매되고 있었고 이 수요의 신장이 대단하므로 장차 한국도 ‘싸이크라메이트’ 개발이 필연적이 될 것이라는데 착안하여 당시 함승호 생산과장이 일본에서 기술 자료를 입수하였다.
수차례에 걸친 실험과 연구 끝에 6개월 만에 시제품을 만들었으며, 제품명도 부르기 쉽게 “뉴-슈가”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판매가 부진하여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는 제품의 문제보다는 홍보의 부족이라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본격적인 제품 광고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문, 방송 등 매스컴을 주로 이용한 뉴-슈가 선전과 더불어 판매 활동을 강화하여 나간 결과 1962년 1월부터 판매 개시된 뉴-슈가의 수요는 나날이 늘기 시작하여 1964년 8월 신도림 공장으로 공장 이전할 때까지 3차에 걸쳐 월 2.5톤에서 월 24톤 생산능력으로 증설되었다.

1963

신도림공장 건설

사카린의 생산을 개시한 이래 주원료인 OTSA의 수입 조달이 불안정하여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 위해 1960년도부터 이의 검토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서는 황산, 염산, 크로루산을 먼저 생산하여야 하기에 투자비 규모가 막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부지는 신도림동으로 정하고 1차로 1963년 3월 10,000여 평을 구입하였으며, 5월 본격적인 공장 건설을 위해 기술실을 신설하였다.
당시 국내 공업력이나 기술력 수준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국내외 관계자들은 당사의 종합 기초 화학공장 건설 계획은 너무나 무모하다고 입을 모았으나, 그대로 추진키로 했다.
이는 1961년 5.16과 더불어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국가 재건, 특히 경제개발의 적극적 방침에 힘입어 조흥도 자신감과 희망을 갖고 건설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건설공사가 진행 중이던 1964년 7월 공장 가동을 위해 화공 기술직 100여 명을 모집하는데, 약 3,000여 명이 응모하여 인근 대학 건물을 빌려서 대대적인 공개시험을 치른 바 있었다. 임직원 모두의 불철주야 합심된 노력 속에 건설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1964년 12월 염전해 공장, 1965년 1월 황산 공장, 3월에 크로루산 공장과 OTSA 공장이 준공되었다.
이로써 만 2년간에 걸친 대역사가 끝나고 원료자급화와 국내 최초의 신알칼리 종합 기초화학 공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67

이스트공장 준공

당사의 관계회사인 대선제분에서 소맥분을 제조 판매하고, 계동산업에서 설탕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에 조흥에서 이스트를 제조하면 빵 공장도 차릴 수 있을 것이고, 소맥분이 필요한 곳에는 이스트도 같이 필요할 것이니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다.

판매부 시장조사를 통하여 생이스트 신규업체의 출현을 환영하고 있음이 파악됨에 따라 장기적으로 전망이 좋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일본의 일청제분(주) 계열사인 이스트 일본 최대 메이커 오리엔탈 효모 주식회사와 기술제휴하여 1968년 5월부터 생이스트 및 드라이이스트를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이스트를 생산한지 1년도 못되어 생산능력이 모자라게 됨에 따라 곧이어 배기 증설을 시행하였다. 1973년 2월에는 의약품으로써 약용 건조효모를 생산 개시 하였으며, 1981년에는 박장열 부장이 이스트엑기스 제조 방법에 대한 특허를 내고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스트엑기스는 라면 스프용 원료로 안성맞춤이란 인정을 받고 1989년 5월에 1차 증설한 후 1년 만인 1990년 6월에 2차 증설을 하게 되었다.

2002년 2월에는 이스트 세포벽에서 베타글루칸을 추출하여 제품화하였다.

1976

기업공개와 주식상장

각 기업의 재무구조와 사업상태를 분석하여 여건을 갖춘 기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기업공개를 권장해오던 정부로부터 1976년 6월 기업공개 대상 기업으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삼보증권을 주간사로 기업공개 작업을 진행하여 1976년 12월 10일 자본금 15억 원으로 증자등기하면서 주권이 교부되었다.
그 해 12월 23일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한 뒤 12월 27일 첫 번째로 개최 된 임시주주총회를 통하여 공개 법인 요건이 참석 주주 만장일치로 가결 확인되어 명실공히 공개 법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1988

노동조합 설립

1982

빵크림 생산개시

1981년 함승호 상무가 일본 오리엔탈 효모 공업주식회사에서 기술을 받아 빵크림 생산 준비를 하여 1982년 3월부터 판매가 시작되었다. 당시 빵크림은 각 제과점별로 소량씩 하루 사용량을 만들어 사용하는 상황으로, 공장을 갖추고 위생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체제는 당사가 유일하였다.
지금의 SPC그룹, 뚜레쥬르, 신라명과, 서울식품, 나폴레옹제과, 성심당 등 모든 제과제빵을 취급하는 곳에서 당사 빵크림을 사용하였다.

1991

연구소 설립

생산관리실의 연구개발과로 운영되어 오던 연구활동은 1991년 4월 연구소를 정식으로 설립함으로써 조흥의 미래를 위한 신제품 개발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연구개발과에서는 화학제품 위주로 개발 활동이 진행되어 왔었으나, 이때부터는 공영호 상무이사가 총괄하고, 박장열 부장이 연구소장을 맡아 식품부문에 대한 연구개발도 활기차게 시작되었다.